도이 다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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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이 다카코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일본 사회당 위원장과 중의원 의장을 역임했다. 1928년 효고현에서 태어나 도시샤 대학에서 헌법학을 전공했으며, 1969년 중의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사회당 위원장 시절, 여성 최초로 일본 헌정 사상 여성 당대표가 되었으며,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의 승리를 이끌며 '도이 붐'을 일으켰다. 이후 중의원 의장으로서 비자민·비공산 연립 정권 수립에 기여했으나, 사회민주당 당수 시절 당세가 쇠퇴하며 정계에서 은퇴했다. 자위대 폐지, 선택적 부부별성 제도 도입 지지 등 진보적인 정치적 입장을 보였으며, 2014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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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 다카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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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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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도이 다카코 |
로마자 표기 | Doi Takako |
한자 표기 | 土井 たか子 |
출생일 | 1928년 11월 30일 |
출생지 | 일본 효고현 고베시 나가타구 |
사망일 | 2014년 9월 20일 |
사망지 | 일본 효고현 |
학력 | 교토여자대학 전문학교 도시샤 대학 법학부 도시샤 대학 대학원 |
직업 | 도시샤 대학 강사 (전) |
종교 | 알려지지 않음 |
서명 | 알려지지 않음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일본사회당 (과거) → 사회민주당 |
국회 의원 | 중의원 |
선거구 | 구 효고 2구 효고 7구 비례대표 긴키 블록 |
당선 횟수 | 12회 |
임기 시작 | 1969년 12월 27일 |
임기 종료 | 2005년 8월 8일 |
중의원 의장 | |
직책 | 제68대 중의원 의장 |
임기 시작 | 1993년 8월 6일 |
임기 종료 | 1996년 9월 27일 |
전임 | 사쿠라우치 요시오 |
후임 | 이토 소이치로 |
천황 | 아키히토 |
사회민주당 당수 | |
직책 | 제2대 사회민주당 당수 |
임기 시작 | 1996년 9월 28일 |
임기 종료 | 2003년 11월 15일 |
전임 | 무라야마 도미이치 |
후임 | 후쿠시마 미즈호 |
일본사회당 위원장 | |
직책 | 제10대 일본사회당 위원장 |
임기 시작 | 1986년 9월 8일 |
임기 종료 | 1991년 7월 31일 |
전임 | 이시바시 마사시 |
후임 | 다나베 마코토 |
기타 정보 | |
학위 | 법학 석사 (도시샤 대학) |
배우자 | 없음 |
웹사이트 | 알려지지 않음 |
2. 생애
도이 다카코는 1928년 11월 효고현 고베시 린다구(현 나가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히로시마현 출신의 개업의였고, 어머니는 교토부 출신이었다.[5] 1935년 고베시 스마尋常高等소학교(현 고베시립 니시스마 소학교)에 입학하여 아버지 친구 집에 기숙하며 전철로 통학했다.
1941년 효고현립 제3고베 고등여학교에 입학하여 1945년 졸업했다. 같은 해 3월 17일 고베 대공습으로 집을 잃었다. 1945년 구제 교토 여자 전문학교 중국어과에 입학하여 1949년 졸업했다. 1949년부터 1954년까지 교토 여자 전문학교를 전신으로 하는 교토 여자 대학에서 강사로 일했다.
도시샤 대학에서 헌법학자 타하타 시노부의 강연 "평화주의와 헌법 9조"에 감명을 받고 1949년 도시샤 대학 법학부 3학년에 편입하여 그의 지도를 받았다. 1951년 도시샤 대학을 졸업하고,[6] 1956년 도시샤 대학 대학원 법학연구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6] 1958년부터 1970년까지 도시샤 대학, 1963년부터 1969년까지 간사이 가쿠인 대학, 1967년부터 1969년까지 성화여자대학에서 강사로 일했다.[7] 전공은 헌법학이었다.
1965년경 KBS교토에서 시사 문제 논평 프로그램, 마이니치 방송의 「여성의 광장 ―내일을 위한 생활」에 고정 패널로 출연했다.
1965년 고베시 직원 노조의 추천과 고베시 의회 사회당 의원단의 제안을 받아 고베시 인사위원회(3명) 위원으로 선출되어 전국 최초의 여성 위원이 되었다.
정계 입문 후, 도이는 자위대 폐지론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사회당 연립 정권에서 여당이 된 후에는 공개적으로 자위대를 비난하지 않았다.
도이는 선택적 부부별성 제도 도입을 지지했다. 그 이유로 “결혼하는 대부분의 여성이 성을 바꾸는 현실은... 남성 혈통 중시의 ‘가정’ 의식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표현”이라고 설명했다.[22]
쇼와 천황 서거 후 헤이세이 시대가 시작되자 후쿠시마 미즈호, 츠지모토 키요미와 함께 연호 폐지를 주장했다.
도시샤 대학 재학 중에는 영화 ‘젊은 시절의 링컨’에 감동하여 변호사를 꿈꾸기도 했다. 영화 ‘평결’에서 변호사를 연기한 폴 뉴먼의 팬이었다.[20]
취미는 파친코와 가라오케였다.[23][24] 제15회 참의원 선거 중에는 보도 관계자들을 파친코 가게에 모아 자신이 파친코를 하는 모습을 촬영하게 했다. 언론은 도이를 “오타카상”, “서민파” 등으로 칭찬했다. 노래에도 능숙하여 자선 합창단 카구라자카 여성 합창단에도 소속되어 있었다.[25]
텔레비전 프로그램 ‘웃어도 좋다!’, ‘퀴즈 더비’, ‘세계 한가득 HOW 매치’ 등에 출연했다.[26][27]
도이가 駄菓子屋(다가시야, 일본식 과자 가게) 주인으로 출연한 CM에서는 “바꿔주지 않아. 헌법 9조 바꿔주지 않아”라는 대사를 하기도 했다.[28][29] 당시 여성으로서는 장신인 168cm였다.
2. 1. 학창 시절과 정치 입문
1928년 11월 효고현 고베시 하야시다구(지금의 나가타구)에서 히로시마현 출신 의사인 아버지와 교토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35] 1935년 스마심상고등소학교에 입학했는데 아버지의 친구 집에서 기숙하며 전차로 통학했다. 1941년 효고현립 미카게 고등학교에 입학해 1945년에 졸업하고 교토 여자전문대학 지나어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 3월 17일 고베 대공습의 여파로 집이 불탔다. 1949년에 전문대를 졸업하고 1954년까지 개명한 모교인 교토 여자대학에서 강사로 일했다.도시샤 대학의 헌법학자 다바타 시노부의 강연 '평화주의와 「헌법」 제9조'에 감동받아 1949년에 도시샤 대학 법학부 3학년으로 편입하여 다바타의 지도를 받았다. 1951년 도시샤 대학을 졸업한 뒤 1956년 도시샤 대학 대학원 법학연구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36] 1958년부터 1970년까지 도시샤 대학에서, 1963년부터 1969년까지 간세이 가쿠인 대학에서, 1967년부터 1969년까지 세이와 여자대학에서 강사로 근무했는데[37] 전공은 헌법학이었다.
1965년 고베시 공무원 노동조합의 추천과 고베시의회 사회당 의원단의 제안을 받아 고베시 인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다. 당시 여성이 인사위원이 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1969년 일본사회당(JSP) 소속으로 일본 중의원에 당선되어 일본 국회 하원 의원이 되었다. 의원 생활 10년 동안은 주목받지 못했으나, 1980년 여성에 대한 일본의 불평등한 대우, 특히 여성 전용 가정학 학위와 부계 중심의 가족 등록법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며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1985년에는 일본이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 철폐 협약(CEDAW)에 서명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2. 2. 중의원 의원 시절
1968년 12월 초, 일본사회당 위원장 나리타 도모미는 도이 다카코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효고현 제2구에서 총선에 출마해 줄 것을 요청했다.[36] 사회당 효고현 의회 의원 우오타니 도키타로도 지부의 의향을 전하고자 매일같이 도이의 집을 방문했다. 훗날 도이는 은사인 다바타가 사회당으로부터 교토시장 선거나 참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을 여러 번 요청받았지만 이를 거절하면서 대신 제자를 한 명 추천하겠다고 했는데 그것이 자신이었다고 회고했다.1969년 1월, 간세이가쿠인 대학에서 강의를 마치고 귀가하던 도이는 전차에서 우연히 옆 사람이 읽던 신문에서 「입후보 결심했나?」라는 제목 아래 자신의 이름이 적힌 것을 보았다. 출마할 생각이 전혀 없던 도이는 신문사에 전화하여 항의하고 다음날 고베시 인사위원직을 사임하고자 시청을 찾았다. 미야자키 다쓰오 부시장에게 도이는 "그런 기사가 일단 나오면 주변 사람에게 민폐를 끼친다"며 사임 이유를 밝혔는데, 미야자키는 "당신답지만 진짜 출마할 거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거다. 어차피 당선도 안 될 건데 그런 무모한 짓을 당신이 할 리가 없다. 사임은 철회하는 게 어떻겠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도이는 "출마할 생각이 없었지만 미야자키 씨의 얘기를 듣고 한 번 일어나 보겠다고 결심했다. 사표를 받아줬으면 좋겠다"라 말한 뒤 부시장실을 나섰다. 다음 달 사회당은 당대회를 열어 효고현 제2구에 현역 의원 호리 마사오와 도이의 공천을 결정했다.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1969년 12월 27일에 치러졌다. 효고현 제2구의 정수는 5명이었는데 4위까지 판가름이 난 상태에서 민사당 소속 현역 의원 야마시타 에이지와 도이가 마지막까지 접전을 벌였다. 약 1,400표 차이로 도이가 간신히 당선되었다. 해당 선거에서 사회당은 90명이 당선되었는데, 마지막으로 당선이 확정된 사람이 도이였다.
1980년에는 국회에서 '남녀 고용 차별', '여성만 필수인 가정학과', '부계밖에 인정하지 않는 「국적법」' 등을 집중적으로 질문하는 등 성차별법과 관련해 정부를 추궁했다. 같은 해 일본 정부는 UN에서 채택했던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철폐에 관한 협약(CEDAW)」에 서명했다.
1983년 9월, 다나카 스미코의 뒤를 이어 사회당 부위원장으로 취임했다.
2. 3. 일본사회당 위원장 시절
1986년 양원 동시 선거에서 사회당이 참패하자 이시바시 마사시 위원장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고, 같은 해 9월 도이는 부위원장에서 승격하는 형식으로 제10대 위원장이 되었다. 이는 사회당 최초의 여성 위원장이자 일본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당대표였다. 이시바시는 위원장에서 물러나기 전, 사회당이 계급정당에서 탈피해 국민정당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내용의 '일본사회당 신선언'을 채택했지만, 이 과정에서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도이는 신임 위원장으로서 이 과정에서 남은 응어리를 풀고 당내 좌우 대립을 조정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도이의 똑 부러지는 말투는 주부층의 호감을 샀고, 이는 도이의 중요한 지지 기반이 되어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당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던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개헌론자로 알려져 있었고, 도이는 이에 대항해 헌법 수호와 군축을 주장했다.[38] 하지만 나카소네는 개헌을 추진하는 대신 사회당이 강하게 견지하던 방위비 1% 틀을 폐지했다. 이후 나카소네는 매출세 도입을 추진했는데, 도이는 공명당, 민사당, 사회민주연합과 공동 전선을 펼쳐 저항했고, 이 무렵 실시된 이와테현 참의원 의원 보궐선거와 제11회 통일지방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이 패배하면서 자민당은 궁지에 몰렸다. 나카소네가 물러난 뒤 총리대신이 된 자민당의 다케시타 노보루는 소비세 도입을 추진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리크루트 사건이 터지자 도이는 이를 강하게 추궁하여 미야자와 기이치 대장상이 물러나고 반년 뒤엔 다케시타 내각도 붕괴했다.
1989년 제1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때 도이는 다시 한번 소비세 도입과 리크루트 사건을 추궁하며 자민당을 압박하고 사공민 노선에 기초해 야당끼리 선거 협력 체제를 구축했다. 그 결과 사회당은 개선 의석이 비개선 의석의 두 배를 넘었고, 개선 의석에서는 자민당보다 많은 당선자를 배출하는 승리를 거뒀다. 비개선 의석을 합치면 여전히 자민당이 원내 1당이었지만 과반수를 무너뜨리는 데에도 성공했다. 이는 도이의 개인적 인기에 힘입은 면이 컸는데, 당시 언론은 이를 '도이 붐'이라 불렀으며 사회당의 정치 신인들은 여성들이 많았기에 '마돈나 붐'이라고도 불렀다. 도이가 선거 결과를 두고 말했던 "산이 움직였다"라는 말도 유명세를 탔다.
선거 이후 도이는 사공민 노선을 유지하여 참의원에서 자민당을 따돌리고 주도권을 쥐었다. 선거 이후 진행된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 중의원은 가이후 도시키를 선출했지만, 참의원은 여소야대 상황 속에서 도이를 지명했다. 참의원에서 여성이 총리대신 지명을 받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중의원의 우월 원칙에 따라 총리대신은 가이후가 유임했다. 사회당이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소비세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웠기 때문이었기에, 사회당은 즉시 소비세 폐지 법안을 공명당, 민사당, 민주개혁연합과 연대하여 12월 11일 참의원에서 통과시켰다. 하지만 중의원에서 부결되었다.
1990년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때 도이는 180명을 입후보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중선거구제하에서 다수의 당선자를 배출하기 위해선 하나의 선거구에 복수의 후보자를 공천해야만 했고, 이는 현역 의원이나 다른 야당의 강한 반발을 샀다. 게다가 자금난으로 인재 영입에 난항을 겪어 실제론 149명을 입후보하는 데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 결과 136명이 당선되어 이전 선거보다 의석이 51석 더 늘어났다. 하지만 리크루트 사건의 후유증을 겪던 자민당도 이전 선거보다 25석 줄어든 275석을 얻어 생각보다 피해가 크지 않았을 뿐더러 과반수도 지켜냈다.
한편 사회당이 의석수를 크게 늘린 데 비해 공명당과 민사당 등 다른 야당들은 오히려 의석이 줄었다. 전술했듯 사회당이 자당의 의석수 확대를 위해 다른 야당의 피해를 아랑곳하지 않고 공천을 했기 때문인데, 이는 두 야당이 사회당을 불신하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공명당과 민사당은 사회당과 거리를 두며 자민당에 접근해 자공민 노선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 여파로 참의원의 구성이 바뀌지 않았음에도 1년 전과 달리 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 가이후가 도이보다 많은 표를 얻어 무난히 총리대신 자리를 지켜냈다. 야당이 분열하자 사회당의 전통적인 지지 기반인 노동조합과의 인연이 없던 도이를 위원장에서 끌어내리려는 시도가 시작됐다.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1991년 제12회 통일지방선거가 사회당의 대패로 막을 내리자 결국 도이는 위원장에서 물러났다.
2. 4. 중의원 의장 시절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사회당은 기존 의석의 반 이상이 줄어드는 참패를 당했다. 하지만 자민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여러 야당이 한데 모여 비자민·비공산 연립 정권을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연립 여당에서 지분이 가장 큰 사회당이 중의원 의장을 배출하는 데 합의가 이루어졌다. 자민당은 제국의회 시절부터 원내 1당이 의장을 배출한 것이 전통이라며 의장직을 강하게 요구했다. 결국 만장일치로 의장을 선출하는 관행을 뒤로 하고 투표를 통해 의장을 뽑아 도이가 의장이 되었다. 도이는 당선 이후 취임 인사차 자민당을 찾았지만 야유만 듣고 돌아왔다.의장이 의원을 지명할 때 일본에선 군(君)을 붙이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도이는 의장이 된 후 상(さん; 씨)을 붙였는데 후임 의장들은 다시 군을 붙이면서 도이의 실험은 새로운 관행으로 정착하지 못했다. 다만 훗날 참의원 의장이 된 산토 아키코가 상을 사용한 적이 있다.
1994년 1월 정치·선거 개혁을 위한 정치개혁 4법안이 일부 사회당 의원들의 반발로 참의원에서 부결되자 도이는 총리대신 호소카와 모리히로와 자민당 총재 고노 요헤이의 회담을 알선했다. 이 회담에서 지역구 의원의 비중을 높이고 비례구 의원의 비중을 낮추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지역 기반이 탄탄한 자민당에게 유리한 조정이었다. 그럼에도 양원협의회를 거쳐 정치개혁 4법안이 양원에서 통과되자 사회당 지지자들은 이를 도이의 실책이라며 비판했다.
1994년 8월 27일 중화인민공화국 톈진시를 방문해 항일순국열사기념관을 찾았다.
비자민·비공산 연립 정권이 무너지고 자사사 연립 정권이 출범한 뒤인 1995년 6월 「역사를 교훈으로 평화로의 결의를 새롭게 하는 결의」안이 상정됐다. 원래 이런 류의 결의는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왔지만 여야 불문하고 찬성과 반대가 뒤섞여 조정이 어렵자 6월 9일 절반에 가까운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다수결로 가결됐다. 야당은 이러한 의사 운영에 반발하며 의장 도이와 부의장 구지라오카 효스케 불신임안을 제출했지만 부결됐다.
1996년 9월 중의원이 해산하자 도이도 의장에서 퇴임했다.
2. 5. 사회민주당 당수 시절
1995년 제17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사회당이 참패한 후, 1996년 당명을 사회민주당으로 변경하였다. 하토야마 구니오가 자민당이 여당으로 복귀하는 데 도움을 준 의원들의 합류에 반대하면서 도이는 사민당에 남았다.사민당은 절반이 넘는 의원들이 민주당으로 넘어가면서 당세가 크게 줄었고, 초대 당수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물러난 뒤 도이가 2대 당수가 되었다. 그 해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임했지만 의석 수는 해산 전의 30석에서 절반인 15석에 그쳤다. 하지만 도이에게 총선 패배의 책임을 묻기보다 오히려 도이를 당의 중추로 하여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며 도이의 지위가 굳건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40] 1998년, 사민당은 연립에서 이탈했다.
1999년 10월, 중국 건국 50주년 기념 군사 퍼레이드에 참가했다.[40]
2000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부의장에 취임하여 2008년까지 재임했다.
2001년 납북 일본인 피해자의 동생인 마스모토 데루아키가 도이에게 납북 문제 해결에 협력해줄 것을 메일로 보내고 직접 만나기까지 했지만, 도이로부터 대답을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41]
2002년 3월, 사민당 의원 쓰지모토 기요미와 비서들이 비서 급여 1870만엔을 편취한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도이의 전 정책비서 고토 마사코가 이를 주도했는데, 도이는 오히려 고토를 감싸는 태도를 보여 비판을 받았다.[42]
2002년 10월,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납북 일본인 문제가 주요 화제로 떠올랐다. 사민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식민 지배 등 과거사 청산 등을 중시하여 납북 문제에 소극적이었다. 이에 도이는 납치는 사실이 아니라는 북한의 발언을 신뢰하여 이 문제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다고 사죄했다.[43] 또한 당의 공식 홈페이지에 납북 사건은 창작된 것이라는 논문을 오랫동안 게재해둔 것에 대해서도 사과했다.[43] 북한과 연결고리가 있는 도이에게 몇 차례나 상담을 요청했으나 무시당한 납북자들의 친인척들은 "일본 정치인이면서 일본 국민의 생명보다 북한을 더 신경 쓰는 것 아닌가", "(사과해도) 지금은 너무 늦었다"라며 도이를 비판했다.[43]
1989년 7월, 대한민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 체포된 재일 한국인 정치범 29명의 석방을 요구하는 문서를 한국 정부에 제출할 때 신광수 등 일본인 납북에 관련된 인사들이 포함되었단 사실이 나중에 드러났다. 2002년 10월 19일, 내각관방부장관 아베 신조는 도이를 콕 집어 굉장히 멍청한 의원이라 칭했으며, 일본공산당도 도이를 비판했다.[44]
2003년 시즈오카 공항 건설 반대 국회의원 서명 활동에 서명자로 참여했다.[45] 그런데 고베 공항은 도이의 지역구와 더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경제에 공헌할 수 있다며 찬성했었기 때문에 이 역시 비판을 받았다.[46]
2003년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때, 자민당 후보 오마에 시게오에게 패배했다. 비례대표로 부활 당선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납북 문제가 사회적으로 크게 반향을 일으키면서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친북적 입장을 취하는 도이가 사민당에서도 고립되면서 지역구에서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47] 같은 해 11월 13일, 당세가 쇠퇴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당수직에서 사퇴했다.
2. 6. 정계 은퇴와 사망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때 지역구에 출마하지 않고 비례대표 긴키 블록에 5번으로 이름을 올렸으나 낙선했다.[48][49] 낙선 후 인터뷰에서 정계 은퇴를 강하게 부인했으나 제2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불출마했고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둔 2008년 10월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했다. 다만 정치 활동은 이어가겠다고 공언했다.2009년 건강이 안 좋아져 고향인 고베시로 이사했다.[50] 2010년 1월 말에는 1990년 12월에 설립해 대표이사를 맡았던 아시아인권기금이 역할을 끝냈다면서 해산을 선언했다.[51]
2014년 9월 20일 폐렴으로 사망했다.[20]
3. 논란과 비판
도이 다카코는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2001년 증원조명은 사민당 의원들에게 납치 문제 협조를 요청했지만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비판했다.[11] 하라 테쓰아키의 형 또한, 동생을 납치한 신광수가 1985년에 자백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이 다카코 등이 "북한은 신사적인 나라"라고 발언했다며 비판했다.[30]
히야쿠다 나오키는 도이 사후 트위터에 "납치 피해자 가족의 정보를 북한에 흘린 의혹"이 있다며 "매국노"라고 단정 지어 논란이 되었다.[31] 하토야마 유키오는 2003년 사민당 비서 급여 유용에 대해 "비서가 한 일"이라는 도이의 주장은 무책임하다고 비판했다.[32]
반면,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도이를 "매우 솔직하고 이상을 중시하며 곧게 나아가는 훌륭한 사회당 당수"라고 평가했다.[33] 사토 유에 따르면 도이는 상징 천황제를 적극 지지했으며 "존황파"였다고 한다.[34]
하나오카 노부아키는 도이가 재일 한국인이며 본명이 이고순이라는 허위 정보를 유포하여 명예훼손 소송을 당했다. 와크와 편집장 하나다 기케이는 오보를 인정하고 사과 광고를 게재했으며, 법원은 이들에게 200만엔의 위자료 지급을 명령했다.[34]
3. 1. 북한 일본인 납치 문제 관련 논란
도이 다카코는 1987년 평양에서 열린 김일성 생일 파티에 참석하여 "우리 일본사회당 당원들은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 밑에서 DPRK(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광스러운 성공을 존중합니다"라는 발언을 한 것이 공개되면서 비판을 받았다.[2] 1989년에는 간 나오토, 지바 게이코, 무라야마 도미이치 등 일본사회당, 사회민주연맹, 공명당 소속 정치인 129명과 함께 1980년 6월 일본인을 납치한 신광수를 포함한 북한 간첩 석방 요구 청원서에 서명하여 한국 대통령 노태우에게 제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었다.[2]2001년에는 북한에 의해 납치된 일본인 문제와 관련하여, 피해자 가족들에게 "극복하라"고 말한 과거 발언이 텔레비전에 방영되면서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2] 증원조명(増元照明)은 당시 아라카와구 의원 사이토 유코(斎藤裕子)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이를 포함한 사민당 의원들에게 납치 문제 협조를 요청했지만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비판했다.[11]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피해자인 하라 테쓰아키(原敕晁)의 형은, 동생을 납치한 신광수가 1985년에 범행을 자백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이 다카코를 포함한 사회당 의원들이 "북한은 신사적인 나라"라는 발언을 했다고 회고하며 정치인에 대한 무력감을 표현했다.[30]
도이는 이러한 논란에 대해 북한 당국이 계속 속였다고 주장하며 피해자 가족들에게 사과했지만,[2] 비판 여론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3. 2. 재일 한국인 정치범 석방 요구 관련 논란
1989년 도이는 간 나오토, 지바 게이코, 무라야마 도미이치를 비롯한 일본사회당, 사회민주연맹 및 공명당의 다른 129명의 일본 정치인들과 함께 1980년 6월 일본인을 납치한 신광수를 포함한 북한 간첩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청원서에 서명하여 한국 대통령 노태우에게 제출했다.[2]4. 평가
도이 다카코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혼재되어 나타난다.
부정적 평가
- 마스모토 데루아키는 2001년 도이 등 사민당 의원들에게 납북 문제 협력을 요청하는 메일을 보냈으나, 직접 만났음에도 답변을 받지 못했다며,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 정당의 자세인가"라고 비판했다.[41]
- 납북 피해자 하라 다다아키의 형은 신광수가 동생 납치를 자백했음에도 "사회당의 도이 등은 북한은 신사적인 나라라고만 한다"며 정치인에 대한 무력감을 느꼈다고 회고했다.[52]
- 우익 인사 햐쿠타 나오키는 도이 사후 8일 뒤 트위터에 "도이는 납치 따윈 없다고 단언했지만, 납치 피해자 가족 정보를 북한에 흘린 의혹이 있다"며 매국노라 비판했다. 비판이 쇄도하자 "정치인은 죽으면 비판을 피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반박했다.[53]
- 하토야마 유키오는 2003년 사민당 비서 급여 유용 사건과 관련, 도이의 전 비서 고토 마사코가 사건을 주도했고, 비서가 저지른 죄는 정치인이 함께 받아야 한다며 도이의 무책임함을 비판했다. 체포된 고토의 당내 영향력은 도이와 비슷했고 이는 잘 알려진 사실이라며, 변명 말고 사퇴해야 한다고 말했다.[54]
긍정적 평가
-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도이를 "굉장히 순수한 이념을 중시하고,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훌륭한 사회당 당수"라고 평가하며 경의를 표했다.[55]
- 작가 사토 마사루는 도이가 상징 천황제 도입에 적극적이었으며, 존황가이자 공화주의자가 아니었다고 자신의 에세이에 썼다고 주장했다.[56]
4. 1. 긍정적 평가
- 자위대 폐지론자였으나, 사회당 연립 정권에서 여당이 된 후에는 일미 안보 유지 및 자위대 합헌으로 정책을 전환하면서 공개적으로 자위대를 비난하지 않았다.[22]
- 선택적 부부별성 제도 도입을 지지했다. 결혼 후 여성이 성을 바꾸는 현실이 남성 혈통 중시의 ‘가정’ 의식이 남아있는 표현이라고 주장했다.[22]
- 쇼와 천황 서거 후 후쿠시마 미즈호, 츠지모토 키요미와 함께 연호 폐지를 주장했다. 이들은 일본 여성 국회의원의 대명사처럼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 젊은 시절의 링컨이라는 영화에 감동하여 변호사를 꿈꿨으며, 영화 평결에서 변호사를 연기한 폴 뉴먼의 팬이었다.[20]
- 파친코와 가라오케가 취미였다.[23][24] 제15회 참의원 선거 중에는 보도 관계자들을 파친코 가게에 모아 자신이 파친코를 하는 모습을 촬영하게 했고, 언론은 "오타카상", "서민파" 등으로 칭찬했다.
- 노래에 능숙하여 자선 합창단인 카구라자카 여성 합창단에 소속되어 있었다.[25]
-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 웃어도 좋아!에 출연하여 "텔레폰 쇼킹" 코너에 출연했는데, 이는 정치인 최초의 출연이었다.[26]
- 퀴즈 더비에서는 8문제 모두 정답을 맞혔다.[26]
- 세계 한가득 HOW 매치에서는 홀인원 상(피타리 상)을 두 번, 니어핀 상을 한 번 획득했다.[27]
- 헌법 9조를 바꾸지 않겠다는 내용의 광고에 출연했다.[28][29]
- 당시 여성으로서는 큰 키인 168cm였다.
4. 2. 부정적 평가
- 2001년 마스모토 데루아키는 도이, 오와키 마사코, 쓰지모토 기요미 등 사민당 의원들에게 납북 문제에 관해 협력을 구하고자 메일을 보냈으나, 도이는 직접 만나고도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이에 마스모토는 "이것이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 정당의 자세인가"라고 비판했다.[41]
- 납북 피해자 하라 다다아키의 형은 신광수가 동생을 납치했음을 자백했음에도 "사회당의 도이 씨 등은 북한은 신사적인 나라라는 얘기만 하고 있다"라며 정치인에 대한 무력감을 느꼈다고 회고했다.[52]
- 우익 인사 햐쿠타 나오키는 도이 사후 8일 뒤 트위터에 "도이는 납치 따윈 없다고 단언했지만, 납치 피해자 가족의 정보를 북한에 흘린 의혹이 있다"라며 도이를 매국노라 비판했다. 비판이 쇄도하자 햐쿠타는 "정치인은 죽으면 비판을 피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반박했다.[53]
- 하토야마 유키오는 2003년 사민당 비서 급여 유용 사건과 관련, 도이의 전 비서 고토 마사코가 사건을 주도했으며, 비서가 저지른 죄는 정치인이 함께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도이의 무책임함을 비판했다. 또한 체포된 고토의 당내 영향력은 도이와 비슷한 수준이었고 이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라며, 도이는 변명하지 말고 사퇴해야 한다고 말했다.[54]
5. 역대 선거 결과
당락 | 선거 | 시행일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득표순위 /후보자수 | 비례구 | 비례순위 /후보자수 | |
---|---|---|---|---|---|---|---|---|---|---|
당 |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69년 12월 27일 | 효고현 제2구 | 일본사회당 | 69,395 | 10.6 | 5/12 | |||
당 | 제3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72년 12월 10일 | 효고현 제2구 | 일본사회당 | 99,341 | 14.9 | 4/8 | |||
당 |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76년 12월 5일 | 효고현 제2구 | 일본사회당 | 106,725 | 13.6 | 4/9 | |||
당 |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79년 10월 7일 | 효고현 제2구 | 일본사회당 | 93,954 | 13.1 | 4/11 | |||
당 | 제3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80년 6월 22일 | 효고현 제2구 | 일본사회당 | 113,338 | 15.1 | 3/9 | |||
당 |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83년 12월 18일 | 효고현 제2구 | 일본사회당 | 101,219 | 12.9 | 3/10 | |||
당 | 제3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86년 7월 6일 | 효고현 제2구 | 일본사회당 | 121,594 | 15.1 | 3/8 | |||
당 | 제3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90년 2월 18일 | 효고현 제2구 | 일본사회당 | 225,540 | 24.8 | 1/10 | |||
당 |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93년 7월 18일 | 효고현 제2구 | 일본사회당 | 220,972 | 24.5 | 1/7 | |||
당 |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996년 10월 20일 | 효고현 제7구 | 사회민주당 | 102,684 | 46.6 | 1/4 | |||
당 | 제4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2000년 6월 25일 | 효고현 제7구 | 사회민주당 | 144,168 | 62.8 | 1/4 | |||
당(비) | 제4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2003년 11월 9일 | 효고현 제7구 | 사회민주당 | 96,404 | 40.8 | 2/3 | 비례 긴키 | ||
낙 |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2005년 9월 11일 | 비례 긴키 | 사회민주당 | 50,800 | 16.5 | 5/5 | |||
당선 횟수 12회 (중의원 의원 12회) |
6. 저서
출판 연도 | 제목 | 출판사 | 비고 |
---|---|---|---|
1984년 | 「国籍」を考える|국적을 생각하다일본어 | 지지 통신사 | |
1985년 | We love憲法|We love 헌법일본어 | 스쿠라무샤 | |
1987년 | 土井たか子マイウェイ|도이 다카코 마이웨이일본어 | 슛판신샤 | |
1987년 | 政治とわたし|정치와 나일본어 | 일본사회당 중앙본부 기관지국 | |
1988년 | 土井たか子 憲法講義 人間が人間らしく生きていくために|도이 다카코 헌법 강의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일본어 | 리욘샤 | |
1989년 | こんなに損していた日本人―社会党がやると日本はこうなる|이렇게 손해보고 있던 일본인-사회당이 하면 일본은 이렇게 된다일본어 | 세이슌 슛판샤 | 우에다 데쓰, 이토 시게루와 공저 |
1989년 | 山の動く日 土井たか子政論集|산이 움직인 날 도이 다카코 정론집일본어 | 스즈사와 서점 | |
1990년 | ODA改革―カナダ議会からの提言と日本の現状|ODA 개혁-캐나다 의회로부터의 제언과 일본의 현상일본어 | 샤카이시소샤 | 요시무라 게이이치, 무라이 요시노리와 공저 |
1993년 | 三木「政治改革」試案とは何か|미키 「정치 개혁」 시안이란 무엇인가일본어 | 이와나미 부클릿 | 구지라오카 효스케, 덴 히데오, 구니히로 마사오와 공저 |
1993년 | せいいっぱい―土井たか子半自伝|최선-도이 다카코 반 자전일본어 | 아사히 신문사 | |
1996년 | 憲法に男女平等起草秘話|헌법에 남녀평등 기초 비화일본어 | 이와나미 부클릿 | 베아테 시로타 고든과 공저 |
2001년 | 21世紀の平和構想 核も不信もないアジアを|21세기의 평화 구상-핵도 불신도 없는 아시아를일본어 | 사회민주당 전국연합 | |
2005년 | ラディカルに「平和」を問う|래디컬에게 「평화」를 묻다일본어 | 호리쓰 분카샤 | 오다 마코토, 가토 슈이치, 기도 에이이치와 공저 |
2006년 | 戦争で得たものは憲法だけだ 憲法行脚の思想|전쟁으로 얻은 것은 헌법뿐이다-헌법행각의 사상일본어 | 나나쓰린쇼칸 | 가야마 리카, 강상중, 사이토 다카오, 신숙옥, 시로야마 사부로, 모리나가 다쿠로, 사타카 마코토 외 공저 |
2007년 | 護憲派の一分|헌법파의 1분일본어 | 가도카와 쇼텐 | 사타카 마코토와 공저 |
2007년 | 君、殺したまうことなかれ 憲法行脚の思想2|그대, 죽이지 마옵소서-헌법 순례의 사상 2일본어 | 나나쓰린쇼칸 | 사와치 히사에, 가야마 리카, 강상중, 사이토 다카오, 사타카 마코토, 다카하시 데쓰야 외 공저 |
2009년 | 「やるっきゃない!」吉武輝子が聞く土井たか子の人生|「할 수밖에 없다!」 요시타케 데루코가 듣는 도이 다카코의 인생일본어 | 파드・위민스・오피스 | 요시타케 데루코와 공저 |
2010년 | アジア・ヒューマンライツ―アジア人権基金の歩み|아시아 휴먼 라이츠-아시아 인권기금의 발걸음일본어 | 나시노키샤 | 무라이 요시노리와 공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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